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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 
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 
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 
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

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한 까닭은 
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.
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. 
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.
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.
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.

- 즐거운 편지, 황동규

 


 

발자국
아, 저 발자국
저렇게 푹푹 파이는 발자국을 남기며
나를 지나간 사람이 있었지

- 발자국, 도종환

 


 

제 마른 가지 끝은 
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.
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.

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.
당신 옷깃만 스쳐도
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.
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.

나부끼는 황홀 대신
스스로의 생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.

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.

- 어떤 나무의 말, 나희덕

 


 

그 사막에서 그는
너무도 외로워
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.
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.

- 사막, 오르텅스 블루

 


 

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
그는 다만
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.

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
그는 나에게로 와서 
꽃이 되었다.

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
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
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
그에게로 가서 나도
그의 꽃이 되고 싶다.

우리들은 모두
무엇이 되고 싶다.
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
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.

- 꽃, 김춘수

 


 

잘 있거라, 짧았던 밤들아
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
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, 잘 있거라
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
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

- '빈집'에서, 기형도

 


 

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
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
나는 젖고 너는 젖지 않는다

이대로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

- 물의 감정, 송승언

 


 

그리움이란 멀리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.
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.
너를, 너와의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 내 가슴을 찢는 일이다.
그리움이란 참 섬뜩한 것이다.

- 외딴 방, 신경숙

 


 

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 
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
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
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
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

- 풍경, 도종환

 


 

그래,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
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.
나의 존재마저 너에게
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.
잠겨죽어도 좋으니
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

- '낮은 곳으로' 에서 , 이정하

 

 


 

 

새를 사랑한다는 말은 
새장을 마련해
그 새를 붙들어 놓겠다는 뜻이 아니다
하늘 높이
훨훨 날려 보내겠다는 뜻이다

- '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', 이정하

 

 


 

 

나는 그렇게 저녁마다 수없이 그대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했다. 
내 속에 있는 그대를 지우는, 혹은 그대 속에 있는 나를 지우는, 
그 안타까운 슬픔을 사랑하겠다.

- 이정하

 

 


 

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
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
잎새에 이는 바람에도
나는 괴로워했다
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
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
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
걸어가겠다

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

 

- 윤동주, 서시

 

 


 

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
그 무수한 길도
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

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
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
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
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
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

사랑에서 치욕으로
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
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

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
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
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
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

나의 생애는
모든 지름길을 돌아서
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

 

- 나희덕, 푸른 밤

 

 


 

 

두 번은 없다. 지금도 그렇고
앞으로도 그럴 것이다. 그러므로 우리는
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
아무런 실습없이 죽는다

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
가장 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
여름에도 겨울에도
낙제는 없는 법

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
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
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
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

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
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
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
한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

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
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
장미?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?
꽃이었던가? 돌이었던가?

힘겨울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
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
너는 존재한다 -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
너는 사라진다 - 그러므로 아름답다

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
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
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
서로 다를지라도

 

- 비스와바 쉼보르스카, 두 번은 없다

 

 


 

 

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
다  흔들리며 피었나니
흔들리며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
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

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
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
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
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듯하게 피웠나니
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

 

- 도종환, 흔들리며 피는 꽃

 

 


 

너 처음 만났을 때
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

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
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

목숨의 처음과 끝
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

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
죽고 싶었다

 

- 문정희, 목숨의 노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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